그리스인 이야기 Ⅲ
시오노 나나미
이경덕 옮김 살림출판사 펴냄
우와, 알렉산드로스가 이렇게 스마트하고 멋진 사람이었나?
나만 모르고 있었던, 누구나 다 아는 역사적 사실이었던 건가?
난 서점 한 귀퉁이에서 날라리처럼, 혹은 무심한 듯 갖춘 옷을 입고는
조용히 앉아서 책장을 넘기는 젊은이들을 너무나 좋아하는
취미? (그래서 그들은 늘 훔쳐 보며 미소 짓곤 함)가 있는데
마치 내 이 취미에 딱 들어맞는 그런 젊은이를 발견한 느낌이었다.
『그리스인 이야기 Ⅲ』으로 넘어가고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 이야기가 시작되면서 말이다.
『소크라테스의 향연』을 읽은 지가 얼마 안 된 참이라
전반부에서는 소크라테스 이야기를 읽으면서
아, 그런 시대적 배경도 있었던 거구나 하면서
소크라테스가 왜 그렇게 죽어야 했나 다시 배우고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유명 철학자가
"그리스인이 아닌 사람(즉 야만족)은 동물이나 식물과 같다고 생각하고 대해야 한다"는
말을 했다는 것에, 그와 매치가 안 되는 이 말이
당시 그리스인으로서는 자연스런 생각이었다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요즘 많이 생각하는 누군가를 평가하는 무서움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누군가가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그 평가를 누가, 어떻게, 정말 할 수 있기는 한 건지 하는 생각.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다 할 수 있는 게 사람인데
언제의 무엇을 기준으로 그 사람을 평가할 수 있는 걸까.
좋은 일과 나쁜 일이 있는 게 아니라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 거라는 말처럼
사람도 이런 면도 저런 면도 다 있는 건 아닐까.
교육에 의해 그 시대 가치관에 의해
억제하고 조절하고 어쩌면 숨기는 모습들도
그냥 다 한 사람 속에 다 있는 모습일 텐데
흑백주의로만 누군가를, 무엇을 평가한다는 건
참 어렵고 서글픈 일인 것 같다.
아무튼
알렉산드로스의 이야기가 시작되면서
오랫만에 흥분하면서 책에 푹 빠져 책장을 넘겼다.
무엇보다도 그에 빠진 건
명쾌, 단순, 과감한 결단력도 멋지긴 하지만
빛나는 보석들이 들어 있는 화려한 상자를 보면서
"나라면 상자 안에 『일리아스』를 넣어둘 텐데."라고 한 말이었다.
이 대사를 읽는 순간 난 완전히 대왕에게 빠졌다.
그리고 동방원정을 위해 21세에 고향을 떠나 33세가 되기 얼마 전에
말라리아로 추정되는 병으로 삶을 마감할 때까지
공격하는 보헤미안으로 살았다는 것.
얼마나 큰 호기심과 용기가 있으면
이런 삶을 살 수 있었던 걸까, 그저그저 부럽기만 했다.
그리고 모든 걸 나눈 친구 헤파이스티온의 존재도
그가 가진 여러 행운 중의 하나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부럽고 그리고 그 친구의 죽음 이후의
그가 느꼈을 처절한 슬픔과 그리고 그의 죽음에
너무나 마음이 아팠다.
시오노 나나미는 말한다.
왜 후세 사람들이 그에게만 '대왕'이라는 칭호를 붙였는지,
그리스도교의 성인도 아닌데 오늘날 그리스도교 신자 부모가
아이에게 알렉산드로스라는 이름을 끊임없이 붙이는지를
생각해주기 바란다고.
"단지 넓은 지역을 정복한 사람이었기 때문일까?
왜 알렉산드로스는 2,3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을까?"
라는 질문들을 우리에게 던지면서
책을 마무리하는 작가의 마음이
너무나 와닿는,
그런 삶을 산 인물이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라는 건
이 책을 읽으면 충분히 알 게 될 것 같다.
여기에 기름을 부은 것이 민주정치로 전환한 정부가 부과한 부동산세였다.
아테네 시민은 집세 수입이 없어져도 집을 갖고 있었기에
이 새로운 세금을 내야 했다. 다만 새로운 세금이 일시적인 것이었는지,
세율이 어느 정도였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국고가 비었다는 이유로 경제력이 향상되지 않았는데,
그 구멍을 세금으로 메우려 했기 때문에 시민들의 평판이 좋을 수 없었다.
평판이 나쁜 정책을 지속적으로 펼치면
정치에 대한 신뢰도 떨어지고 만다.
23 쪽
소크라테스는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쳤다.
생각의 결과로 생겨난 것이 민주파이든 과두파이든 그것은 철학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소크라테스는 징병되면 스스로 전쟁터로 나갔고
추천으로 선출되면 국가 공무원으로도 근무했는데,
민주정치를 시행하고 있는 아테네라서가 아니라 조국 아테네의 시민으로서
책무를 다하겠다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애국심에서 그렇게 한 것이었다.
제자 중에는 민주파도 있고 과두파를 지지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소크라테스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또한 제자 가운데 사회적으로
상류층에 속한 사람도 있었고 하류층에 속한 사람도 있었지만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시민이 될 수 없는 노예도
지혜를 사랑하는 마음만 있다면 기꺼이 제자로 받아주었다.
물론 상대가 누구든 돈도 받지 않았다.
이런 인물을 최대 다수의 사람들이 생각해서 만든 법률로 재판할 수 있단 말인가.
39 쪽
소크라테스는 죄를 뒤집어쓰고 죽어야 하는 상황을 역으로 이용해 자기의 철학을
완성시켰다. 한편 아테네는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이 애국자를
사형에 처하면서 지금의 혼란에서 탈출할 수 있는 힘조차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하고 말았다. 소크라테스 재판은 철학의 주제에 머무르지 않고
역사의 주제가 되었다. 나는 소크라테스가 그리스의 다른 도시국가라면
절대로 태어날 수 없는 테미스토클레스나 페리클레스와 같은 성질의
'진정한 아테네인'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상대를 뒤흔들면서도 자신은 전혀 흔들리지 않고
동요로 불안해진 사람을 끌어들이는 재능이 뛰어났다.
그렇기 때문에 일시적으로는 패배하더라도 영원한
승자가 될 수 있었다.
47 쪽
필리포스는 경제력의 향상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통치자였다.
문화가 지닌 힘의 중요함도 알고 있었던 듯하다. 3년 뒤에 아테네의 플라톤이
세운 아카데미에서 20년이나 공부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를 아들인
알렉산드로스의 가정교사로 초빙했다. 어쩌면 90세의 이소크라테스가 말한 말이
과녁을 명중시킨 것인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아테네가 마케도니아의 우산 아래
들어갈 것이고 그 속에서 아테네가 지닌 힘을 발휘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었다. 오늘날의 언어로 바꾸면 소프트 파워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말이다.
222 쪽
알렉산드로스는 뒤에서 몰래 무슨 일을 꾸미는 남자가 아니었다.
이익이 된다는 것을 알아도 야습을 하기보다 태양 아래에서 정정당당한
도전을 선택하는 남자였다. 왕과 가까운 근위병을 활용해 아버지를 죽이는 일 따위는
절대로 하지 않았을 것이다. 윤리에 저촉되어서가 아니라
기질적으로 그럴 수 없는 사람이다.
255 쪽
이런 일로 시해라는 큰일을 감행할까,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보통은 그렇지 않다. 살의에는 객관적인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은 분노하더라도 살인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살인까지 가는 사람도 있다. 경찰의 초동수사가 종종
틀리는 것은 설마 그 정도의 동기로 살인을 저지를까, 하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56 쪽
어느 겨울 날, 다음 해 봄에 동방 원정을 떠나려고 마음먹은 알렉산드로스는
출전하다는 인사를 하기 위해 옛 스승을 찾아갔다.
50세가 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제 마케도니아의 왕이 된 알렉산드로스의
소년 시절 교사였다. 철학자는 과거의 애제자가 소년 시절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모습으로 말하는 열정적인 원정 계획을 모두 들은 후에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
"이제까지 그리스에서 누구 하나 생각하지 못한 장대한 계획이라는 것은
잘 알겠다. 그러나 몇 년 정도 미루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그사이에 경험도 쌓일 테고 신중하게 대처해서 얻는 이점이 있다는 것도
배울 수 있을 테니."
21세의 젊은 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말씀하신 대로예요. 나이를 먹으면 경험이 늘어날 것이고
신중함도 몸에 배겠지요. 그러나 젊기 때문에 충분히 갖고 있는
순간 대응력은 약화되고 말 거예요."
261 쪽
올림피아스는 그리스적이라는 면에서 자기가 남편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럴 만도 한 게 당시 그리스 여자로서는 드물게 '배움'이 있었다.
아직 어린 아들에게 『일리아스』를 읽어주었고 아들이 스스로 읽을 수 있게 되었을 때
이 책을 선물했다. 호메로스의 작품인 장편서사시 『일리아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생애 최고의 책'이 되었다.
소년은 이 서사시의 최고 영웅 아킬레우스를 동경했다.
『일리아스』의 주인공은 영리함이라고는 약에 쓰려 해도 없는 사람이었다.
순수하고 정직하며 공정하게 일을 해결하기 좋아했고
장수를 누리기보다는 단명하더라도 빛나는 삶을 살겠다고
호언장담한 아킬레우스였다. 정열적이고 꿈을 꾸는 소년이 동경한 대상은
당연한 말이지만 오디세우스가 아니라 아킬레우스였다.
264 쪽
물론 두 사람 모두 『일리아스』를 읽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책을 덮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아킬레우스이고, 너는 파트로클로스."
헤파이스티온은 웃어넘길 줄 아는 상냥함을 갖고 있었다.
불사신이 아닌 파트로클로스와 달리 아킬레우스가 불사의 몸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헤파이스티온도 알고 있었다. 어머니인 테티스가 불사신을
만들 수 있는 샘에 아들 아킬레우스의 몸을 담글 때
다리 끝부분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부분은 불사신이 되었지만
그 부분만은 그렇지 못했다.
우리는 그 부분을 '아킬레스건'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죽어야 하는 몸'을 가진 '인간'알렉산드로스를 아킬레스건 빼고는
불사신인 영웅과 비교하는 것은 모순이다.
그러나 헤파이스티온은 그런 아이 같은 논리의 모순을 굳이 지적하지 않는
상냥함을 지니고 있었다. 이 어릴 적 친구는 훗날
알렉산드로스의 '생애 최고의 친구'가 된다.
267 쪽
그는 발군의 균형 감각을 지닌 사람이기도 했다. 논리학의 창시자로 불리지만
다음과 같은 말로 그것의 남용을 경계했다.
"논리적으로는 옳아도 반드시 인간세계에 옳다고 할 수는 없다."
'지식'과 '지혜'의 차이를 통감하게 만드는 말이다.
276 쪽
고대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소년 제자들에게 가르친 것은 기본적으로
다음의 세 가지로 집약된다.
첫째, 앞서 살았던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했는지
배우는 것이다. 이는 역사로 세로축을 가진 정보이다.
둘째, 이와 달리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로 가로축을 가진 정보이다.
여기서 배워야 할 점은 이들 정보에 대해 편견 없이 냉정하게 수용하는 자세를
확립하는 것이다.
마지막은 첫째와 둘째를 토대로 자기 머리로 생각해 자신의 의지로
냉철하게 판단한 다음 실행하는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세 가지는 철학을 배우는 기본적인 자세이기도 한데,
이 원칙을 습득하면 그 후 어떤 분야로 진출하든
완전하게 응용이 가능하다.
279 쪽
하지만 스승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단순한 우등생으로 끝나고 만다.
알렉산드로스는 달랐다. 스승이 말한 다음의 가르침에는 전혀
따르지 않았다.
"그리스인은 동등한 친구로 대해도 좋지만 그리스인이 아닌
사람(즉 야만족)은 동물이나 식물과 같다고 생각하고 대해야 한다."
페르시아로 갔을 때 알렉산드로스는 특히 이 가르침과는
정반대라고 해도 좋은 태도를 취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읽고 느낀 개인적인 소감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어쩔 수 없는 도시국가 시대의 그리스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와 달리 알렉산드로스는 도시국가를 초월한
그리스인이었다.
아무튼 스승으로부터 모든 것을 배웠지만 스승의 가르침을 모두
따르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뛰어난 제자였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닐까.
철학 자체가 자기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가르친다는 점에서 그렇다.
280 쪽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에는 지리나 역사, 동식물을 비롯한 많은 분야의
전문가들이 동행했다. 모든 것에 관심을 가졌던 스승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철학자도 동행했다.
칼리스테네스라는 이름을 가진 철학자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조카인 듯한데, 알렉산드로스는 백부의 인연으로
동행한 이 남자에게 자신 외에 고위 장군의 시중을 드는 소년들을
통솔하는 역할을 맡겼다. 그리스나 로마에서는 여자가 아닌
소년에게 시중을 들게 했다.
319 쪽
'그라니코스 전투'는 알렉산드로스가 왕이 되어 치르는 최초의 전투다운
전투였다. 아직 21세였으므로 주위 사람들도 느낄 정도로 긴장했을 것이다.
그런 왕에게 2인자인 파르메니온이 가까이 다가와 나란히 말을 타고 가면서 말했다.
전쟁터에 들어가는 때가 저녁이니 야습을 하면 어떻겠냐고.
아버지의 오른팔이었던 노장의 충고에 21세가 대답했다.
"나는 승리를 훔치러 가고 싶지 않아요."
이 대답은 멋지게 들리기도 하지만 이치에 맞기도 했다.
야습은 방심한 적을 공격하는 것이지만 아군 병사도 혼란에 빠지기 쉬웠다.
야습이라는 공격법이 효과를 발휘할 때는 소수의 적을 소수의 병사로
공격할 때다. 강 맞은편에 넓게 퍼져 있는 만 단위의 적을
만 단위의 병사로 공격하는 일은 없다.
일단 밤이라 해도 강을 건너야 했기 때문에 소리를 내지 않고는
접근할 수 없었다.
328 쪽
"이 매듭을 푸는 자가 오리엔트의 지배자가 된다는 전설이 있지만
아직까지 성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쯤 되면 알렉산드로스도 물러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여러 겹으로
얽혀 있는 줄의 끝이 어디인지 찾을 수도 없었다.
마케도니아의 젊은 왕은 잠시 침묵하면서 매듭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오래 망설이지는 않았다.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풀 수 있는지
해결책을 찾아내려고 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긴 칼을 들고
단번에 내리쳤다. 가죽끈으로 묶여 있던 줄은 둘로 조각났다.
전차와 그것을 끄는 채도 둘로 나뉘었다.
매듭을 손으로 풀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었다.
칼로 잘라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 역시 어디에도 없었다.
금지되어 있지도 않은데 지금까지 도전했던 사람들은 매듭을 손을 사용해
풀려고 생각했던 것이다. 금지되어 있지 않다면 해도 된다고
생각한 사람이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오늘날 유럽에서는 이 '고르디우스의 매듭'에 다음과 같은 해석을 덧붙인다.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단호한 의지로
명쾌, 단순, 과감하게 처리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고르디온의 에피소드와 함께 알렉산드로스의 원정도 2년째 접어들어
기원전 333년이 되었다. 마케도니아의 젊은이에게는
22세에서 23세가 되는 1년이 시작된 것이다.
358 쪽
젊은 왕은 거짓 의심이 담겨 있는 정보를 전해준 파르메니온을
비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에 관한 농담도 하지 않았다.
거짓 의심이라도 모든 정보를 보고하는 것이 아랫사람의 의무였다.
올라온 정보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는 윗사람이 판단할 문제였다.
363 쪽
고민은 승리의 발목을 잡지만 확신은 승리로 이끈다. 이 또한 다리우스의 15만 명과
알렉산드로스의 3만 명의 차이점이었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전투에서 이기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아군이 공포에 빠지지 않게 하면서 적을 공포로 몰아넣으면 된다.
어떻게 하면 이와 같은 상태를 만들 수 있을까?
이것이 전략과 전술이다.
전쟁터에서 병사는 육체로 싸우는 데 반해, 총사령관은 두뇌로 싸우는 것은
승리를 위한 전략과 전술이 이 한 점으로 집약되기 때문이다.
375 쪽
한편 포로의 증언을 이끌어내기 위해 벌거벗기거나 고문을 자행하지는 않았다.
인간의 나체야말로 아름다움의 극치라고 생각한 그리스에서는 신들의 입상도
나체로 표현할 정도로 벌거벗은 몸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반면 오리엔트에서는 벌거벗는 것은 최고의 치욕이었다.
나체는 노예 신분으로 전락했음을 의미했다. 오리엔트에서는 남자가 나체가 되는 것만큼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도 없었다.
알렉산드로스는 포로에게 그런 치욕을 맛보게 하지 않았다.
기병은 페르시아 사회의 엘리트였다.
젊은 왕은 그들을 정중한 말투로 대했다고 전한다.
덕분에 페르시아의 기병도 결국 정직하게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털어놓았을 것이다. 아무튼 알렉산드로스는 단번에 다양하고 귀중한 정보를 손에 넣었다.
452 쪽
게다가 알렉산드로스가 지금껏 경혐해보지 못한 200대의 낫이 달린 전차와
15마리의 코끼리라는 새로운 병기까지 있었다.
다리우스는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49세가 된 이 남자의 단점은
마음을 결정한 다음에도 계속 고민을 한다는 것이었다.
반대로 적이 전쟁터를 선택하는 것을 문제 삼지 않았던 25세의 젊은 왕은
싸울 곳이 결정되면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았다.
455 쪽
서양에서 알렉산드로스 이후에 나타난 고대의 명장을 꼽는다면 다음의
세 사람일 것이다. 두 차례에 걸친 포에니전쟁에서 16년 동안 로마군을 능멸했던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 그 한니발을 마지막 전투에서 무너뜨린
로마의 장군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그리고 인도까지 '동방'을 제압한 알렉산드로스처럼 '서방'을 제압하고
훗날 윈스턴 처칠이 영국의 역사는 카이사르가 도버해협을 건던 뒤에
시작되었다고 말하게 만든 로마의 장군 율리우스 카이사르.
전략과 전술에서 절대적인 자신감을 갖고 있었던 이 세 사람도
최고의 무장을 알렉산드로스로 꼽은 점에서는 완전히 일치했다.
그럼에도 세 사람은 전쟁터에서 알렉산드로스의 방법을 그대로 따르지 않았다.
부분적으로는 도입했지만 전면적으로 따르지는 않았다. 왜일까?
이탈리아어로 '푼타 디 디아만티'라는 말이 있다.
다이아몬드가 달린 끝을 의미하는데, 연마 도구의 끝에 달려 있는
다이아몬드를 가리킨다. 가장 단단한 광석인 다이아몬드를
앞에 달면 쉽게 절단되지 않는 것도 자를 수 있다.
이 3명의 명장은 세로로 긴 마름모꼴 진형을 이루며 돌격하는
마케도니아 기마 군단의 위력과 효력을 충분히 이해했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라고 하는 '푼타 디 디아만티'이기에 가능하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이들이 '다이아몬드가 달린 끝'이 될 용기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선두에 서서 돌진해야 하므로 '끝'은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최고사령관의 몸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중앙과 좌익에서 아무리 우세하게
싸운다 하더라도 무너지고 그러면 이기다가도 순식간에 패하고 마는 것이
알렉산드로스의 전투 방식이 지닌 현실이었다.
한니발이나 스키피오, 카이사르는 종종 최전방에 서서 지휘를 맡았다.
카이사르는 홀로 바람에 나부끼는 큰 붉은색 망토를 입고 있어서
아군도 알아보지만 적군도 알아볼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지휘했다.
그러나 3명의 명장은 스스로 '다이아몬드가 달린 끝'이 된 적은
한 번도 없었고 그 전술을 시도한 적도 없었다.
세 사람은 때로 패배를 경험하기도 했지만 알렉산드로스는 마지막까지
연전연승이었다.
477 쪽
애초부터 알렉산드로스는 사치에는 관심이 없는 남자였다.
이소스의 전쟁터에서 다리우스가 버리고 간 화려한 물건 가운데 오리엔트의
기예가 들어간 아름다운 작은 상자가 하나 있었다.
상자 안에는 진주와 루비, 에메랄드가 들어 있었다.
그것을 본 알렉산드로스는 화려하게 만들어진 상자를 물끄러미 보면서 말했다.
"나라면 상자 안에 『일리아스』를 넣어둘 텐데."
이쯤 되면 금괴나 보석이 병사의 봉급으로 바뀐 것도 무리가 아니다.
전쟁터에서도 알렉산드로스의 군장은 다른 사령관과 다르지 않았다.
투구 위에서 바람에 날리는 하얀 깃털 장식만 달랐다.
그것도 부하 장군과 차이를 두기 위한 것이 아니라 최고사령관이
어디서 싸우고 있는지 병사들이 쉽게 알아보게 하려고 한 것이다.
407 쪽
무지는 종종 완고한 저항이라는 형태로 표면화된다.
425 쪽
한편 알렉산드로스는 산양이 다니는 길밖에 없다는 말을 들으면 그 길은 인간도
지나갈 수 있다고 대답하며 선두에 서서 돌파하기도 했다.
식사할 때도 병사들과 같은 음식을 먹었고, 많은 천막을 칠 수 없는 장소에서는
장수들과 혼숙하는 것도 꺼리지 않았다.
그와 부하 장수를 나누는 것은 처우나 복장이 아니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투구 위에서 바람에 날리는 하얀 깃털 장식뿐이었다.
부하 장수들도 깃털을 달고 있었지만 하얀 색은 알렉산드로스만 달았다.
눈 속에 행군을 할 때도, 산의 정상에 세워진 성채를 공격할 때도 알렉산드로스는
그저 호령만 하지 않았다. 병사들은 늘 앞에 가는 하얀 깃털 장식을 보면서
뒤를 따라갔다. 알렉산드로스도 뒤를 따르는 부하들을 얼굴 없는 집단으로
보지 않았다. 행군하는 길을 잘못 선택하거나 전투 때 전술을 잘못 사용한 경우에는
솔직하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물론 잘못을 인정한 다음에 곧바로 다음은 어떻게 하겠다고 말했다.
이는 그의 특징이기도 했다. 그 말을 듣고 있는 병사들은 자신이 하나의 인간으로
인정받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알렉산드로스의 평전을 쓴 고대의 역사가는
이 젊은 왕의 특징으로 '속공'과 '인내'에 이어서 '인간성(후마니타스)'을 거론했다.
후마니타스는 휴머니티의 어원이 된 라틴어이다.
544 쪽
지형도 복잡하고 사회형태도 다양한 중앙아시아를 제패하는 데 성공한 유럽인은
전에도 없었고 나중에도 없었다. 오직 알렉산드로스뿐이었다.
546 쪽
취기가 가시고 멍하게 서 있는 알렉산드로스는 친구들이 끌다시피해서 침실로
데려갔다. 그날 밤부터 28세의 젊은이는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방에 처박혔다.
사건이 일어난 밤에 다른 지방에 있던 헤파이스티온도 달려왔지만 그 역시
입실이 허용되지 않았다. 식사도 하지 않았고 마실 것도 마시지 않았다.
그사이 방안에서는 클레이토스와 그의 여동생이자 알렉산드로스의 유모였던
라니케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렉산드로스는 아마 그때 처음으로 자기혐오에 빠졌을 것이다.
도발한 쪽은 분명 클레이토스였다. 그러나 거기에 넘어간 사람은 알렉산드로스였다.
그때까지 늘 장병들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살아온 알렉산드로스였다.
위에 서는 자에게 가장 중요한 책무는 자기통제이다.
알렉산드로스는 그것을 잊었다.
장수부터 병사까지 알렉산드로스를 걱정했다. 미치지 않을까 걱정했다.
헤파이스티온마저 입실이 허용되지 않자 점쟁이까지 동원했다.
신의 심부름꾼이 방 밖에서 울부짖었지만 방문은 열리지 않았다.
점쟁이도 신앙심이 부족한 왕에게 내린 신의 벌이라고 혀를 내두르며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나흘째 아침이 되자 걱정하며 광장에 모여 있는 병사들 앞에 알렉산드로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병사들은 처음에 초췌한 왕을 걱정스러운 듯 바라보았지만
그래도 살아 있는 모습을 보고 안도했는지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병사들을 앞에 둔 알렉산드로스의 뺨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병사들이 왕의 눈물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28세의 왕은 그들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다시 일어선 것이다.
그날부터 예전의 알렉산드로스로 돌아갔다.
554 쪽
알렉산드로스가 병으로 쓰러진 친구의 병문안을 갔을 때 헤파이스티온은
큰 병이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 그때는 큰 병으로 보이지 않았다.
알렉산드로스도 숙소로 사용하고 있는 도시의 궁전에 아픈 친구를 두고
매일처럼 도시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교외의 신병 무술훈련장을 오고 갔다.
가을이 깊어진 어느 날, 평소처럼 페르시아 젊은이들을 훈련시키고 있을 때
한 마케도니아 병사가 숨을 헐떡거리며 알렉산드로스에게 달려왔다.
그는 헤파이스티온의 병세가 급격하게 나빠졌다고 보고했다.
젊은 왕은 땀도 닦지 않고 말에 뛰어올라 전속력으로 도시를 향해 달렸다.
말에 박차를 가해 달려갔지만 도착했을 때는 이미 헤파이스티온이 세상을 떠난 뒤였다.
알렉산드로스는 친구의 유해에 매달려 울부짖었다. 한참동안 누구도
알렉산드로스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친구의 이름을 부르면서 울던 알렉산드로스를
과거 동료들이 겨우 유해에서 떼어냈다. 왕의 동료들은 거의 미치광이가 된
알렉산드로스를 방으로 데려가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왕은 문을 굳게 닫아걸었다.
먹을 것도 입에 대지 않고 실내에 처박혀 있었다.
흐느껴 우는 소리도 이제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사흘 낮 사흘 밤 동안 알렉산드로스는 바닥 모를 깊고 어두운 비애 속을
떠돌아 다녔다.
고대의 역사가들은 헤파이스티온만이 알렉산드로스의 마음속 전부를 알고 있었다고
전한다. 무엇이든 말했기 때문에 모두 알고 있었다. 헤파이스티온은 왕과
가까운 사이였지만 그것을 자기의 이익을 위해 사용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모두 두 사람의 특별한 관계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특별한 관계 그 이상은
아무것도 없었다.
예전에 텔레비전에서 BBC에서 제작한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영국인다운 냉철함으로 동방 원정 10년 동안 알렉산드로스가 입은 상처 전부를
인체 모형을 사용해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해설하는 프로그램이었다.
그것을 보면서 만신창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그러나 모두 외상이었지
마음의 상처는 아니었다. 마음의 상처는 과학적으로 해명할 수가 없을 테니까.
젊은 마케도니아의 왕에 대해 여기까지 쓴 지금, 나는 거의 확신에 가까운 생각이 든다.
알렉산드로스는 헤파이스티온이 죽었을 때부터 스스로도 죽음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고.
BBC프로그램에서도 알렉산드로스가 인더스강을 따라 내려갈 때 입은 상처가
거의 죽음에 이를 정도의 중상이었다고 지적했다.
그때 완쾌까지 2개월이 걸렸다.
하지만 마음을 의지하던 친구의 죽음이 남긴 상처는 완쾌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알렉산드로스의 책임감은 이상할 정도로 강했다.
4일째부터 왕의 직무에 복귀했다. 알렉산드로스가 했던 일 가운데 하나는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바치는 제사였다.
알렉산드로스는 그 자리에서 사람들이 앞에 있었지만 이렇게 말했다.
"왕이라는 의무 때문에 제사를 지낸다. 그러나 신들 가운데서도
아스클레피오스는 내게 조금도 행복을 주지 않았다.
나에게서 이렇게 빨리 헤파이스티온을 빼앗아간 것만큼 아스클레피오스의 태만을
보여주는 일도 없을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신관이나 점쟁이는 신에 대한 경건함이 없다고 알렉산드로스를
비난했다. 모여 있는 사람들도 비난까지 하지는 않았지만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알렉산드로스는 그런 반응에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헤파이스티온을 빼앗아간 자는 그가 신이라고 해도
알렉산드로스에게는 적이었다.
633 쪽
해가 바뀌어 기원전 323년이 되었다.
주변에서 보기에 알렉산드로스는 완전히 평정을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
장수들을 모두 소집해 다음 원정을 위한 작전 회의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633 쪽
수사에서 바빌론으로 장소를 옮기는 회의에서도 알렉산드로스는 여전히 30대
젊은이답게 열을 올리며 말했다. 함께 공부했던 동료들도 그런 왕의 모습을 보고
알렉산드로스가 예전의 모습으로 완전히 돌아왔다고 생각했다.
만약 그들 가운데 사람의 마음 깊숙한 곳까지 꿰뚫어보는 감수성을 지닌 사람이
있었다면 알아차렸을 것이다. 왕이 예전과 달리 열심히 말하던 도중 갑자기 멈추고
잠시 침묵했다가 머리를 한번 흔들고는 다시 하던 이야기로 돌아온다는 사실 말이다.
젊은 왕은 여전히 헤파이스티온의 부재에 익숙하지 않았다.
전에는 시선을 돌리기만 해도 눈으로 대답해주는 사람이 있었다.
말을 주고받지 않아도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었다.
그처럼 당연하 존재가 지금은 없다.
알렉산드로스는 어릴 때부터 머리를 왼쪽으로 조금 기울이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가 시선을 향하는 방향에는 늘 헤파이스티온이 있었다.
친구는 말없이 물음을 던지는 알렉산드로스에게 무언으로 대답했다.
아주 오랫동안 그렇게 지내왔기 때문에 알렉산드로스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왼쪽으로 기울이고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이제 의미 없는 행위라는 것을
시선을 돌릴 때마다 깨달아야 했다. 서방의 제패에 필요한 사항을
차례로 명령하는 알렉산드로스가 이전보다 훨씬 활발하고
적극적으로 보였는데, 이는 유일무이한 친구의 죽음을
잊으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639 쪽
그러나 출전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알렉산드로스는 장수들과 회의를 하다가
갑자기 무너지듯 쓰러졌다. 장수들의 부축을 받고 방으로 돌아온 왕은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 달려온 의사들도 그 원인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날부터 일어났다가 눕기를 되풀이했다.
3일 동안 고열에 시달리다가 4일째 아침에는 건강한 모습을 되찾았다.
알렉산드로스도 별일이 아니라고 말하고 부하 장수들도 그렇게 느꼈기 때문에
출전 연기를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며칠 뒤에 다시 고열이 찾아와
병상에 누워야 했다. 또 며칠 뒤에 다시 건강한 모습으로 모두 앞에 나타났다.
충실한 그리스인의 왕답게 목욕재계하고 신들에게 바치는 제사도 지냈다.
기력을 회복해도 다시 병상에 쓰러지기까지의 시간은 계속 줄어들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어쩔 수 없이 출전하는 날을 연기하겠다고 발표했다.
그 이후에도 기력을 회복하고 있는 시간을 늘이지 못했다.
현대의 연구자들은 말라리아에 걸렸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말라리아라면 32세의 체력으로 충분히 회복할 수 있지만
이미 알렉산드로스는 체력을 많이 소진한 상태였다.
640 쪽
이틀이 지난 밤에 알렉산드로스는 세상을 떠났다. 기원전 323년
6월 10일, 33번째 생일을 한 달 앞둔 날이었다. 그는 완전히 몸을 태운
초처럼 세상을 떠났다. 21세에 유럽을 뒤로 하고 아시아로 건너온 뒤
한 번도 마케도니아나 그리스로 돌아가지 못한 채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있는 바빌론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642 쪽
이제까지 이 책을 읽어준 여러분에게 원하는 바는 연표를 보면서 33세가 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젊은이의 일생을 찬찬히 음미해보았으면 하는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기 생애를 간단하게 정리하는 걸 흔쾌히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 같다. 알렉산드로스도 짧지만 충실한 생애를
쉽고 간단하게 정리하는 걸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 알렉산드로스의 생애를 차분하게 돌아보면서 우리 하나하나가
그를 떠올려주는 편을 좋아할 것이다.
그리고 생각해주기 바란다. 왜 후세 사람들이 그에게만 '대왕'이라는 칭호를 붙였는지.
왜 그가 그리스도교의 성인도 아닌데 오늘날 그리스도교 신자 부모가
아이에게 알렉산드로스(영어로는 알렉산더, 이탈리아어로는 알레산드로,
약칭으로는 알렉스)라는 이름을 끊임없이 붙이는지를,
그 이유가 단지 넓은 지역을 정복한 사람이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유달리 사랑하는 자식에게 그 이름을 붙여줄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일까? 왜 알렉산드로스는 2,3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을까?
644 쪽
읽으면 생각하게 된다. 생각을 가지면 동료 연구자들과 이야기하게 된다.
이야기를 나누면 논문으로 발표하고 싶어진다.
667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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